"들어가 쉬어라. 오늘 들은 얘기 내일 중대장한테 보고하겠다."
그날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적은 이 부대에 처음 배치받은 날 빼놓고 처음이다.
다음 날 우리는 중대장에게 불려갔다. 결론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날만큼은 중대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군인정신 부족 같은 훈계는 하지 않았고, 근무에 열중하라는 말만 하였다. 그날 이후로 정상병은 말이 없어지고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내무반 뒤뜰에 혼자 앉아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우리는 소대별로 돌아가면서 일주일 동안 식당 청소와 아침 근무자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 주는 우리 소대가 담당이었다. 밥을 챙길 수 없는 아침 근무자의 식사는 담당 소대가 미리 준비해 놔야 한다. 그런데 배식과 청소에 열중한 나머지 아침 근무자의 식사가 늦어진 것이다. 근무자가 돌아왔을 때 부대원들은 거의 식사가 끝나가는데 근무자 식사가 준비 안 된 것이다. 근무자인 1소대 이상병이 우리 소대 일병들에게 다가와 짜증을 냈다.
"이 자식들이 어디다 정신 팔고 다니는 거야?"
그제서야 근무자 식사를 깜박했다는 사실을 안 일병들은 밥을 먹던 도중 급히 일어나 사과했다.
"시정하겠습니다. 곧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일병 막내 축에 속하는 나는 후다닥 식판 두 개를 들고 배식판으로 향했다. 이상병은 계속 아니꼽다는 듯이 성질을 냈다.
"2소대 왜 그래? 정신 차려 임마!! 니네 귀신 나타났다고 위병소에 불도 켰다며?"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정상병이 음식물이 담긴 식판을 이상병에게 던져버렸다.
"이 신발 새끼가 어디서 지랄이야!!"
욕설과 함께 미친 사람처럼 눈을 부릅뜨고 정상병은 이상병에게 달려들어 주먹과 발길질을 사정없이 날렸다. 며칠 전 밤에 보았던 정상병의 그 모습이 다시 재현된 것 같았다. 여느 날 같았으면 뜯어말리고 끝날 일이었지만 그날은 정상병이 큰 실수를 하였다. 중대장이 사병 식당에서 식사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중대장 앞에서 사병들간의 그런 험한 꼴을 보였으니 난리가 아니었다.
분노한 중대장은 정상병과 이상병에게 군장을 매고 연병장을 돌 것을 명령했다. 늘 보는 얼차려이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날은 군장 속에 모래와 자갈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중대장은 굉장히 엄했다.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뺑뺑이를 돌리는 것도 모자라 점심시간이 되자 식당까지 포복으로 기어서 가도록 했다. 서서 밥 먹는 중에도 군장을 벗지 못하게 했고 식사가 끝나자 다시 포복으로 연병장까지 기어가 뺑뺑이를 돌게 만들었다.
부대 분위기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침체되어 있었다. 무슨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무엇을 해야 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루 동안의 얼차려가 끝나자 정상병은 이상병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넨 후 조용히 내무반 뒤뜰로 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의 몸은 물을 끼얹은 듯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나는 그가 괜히 나 때문에 얼차려를 받은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정ㅇㅇ 상병님.. 괜찮습니까?"
나의 물음에 정상병은 아무 대답도 없이 담배만 깊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멍하니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연신 담배만 빨던 정상병이 입을 열었다.
"야.....이ㅇㅇ"
"일병! 이ㅇㅇ!!"
"그날...니가 귀신 봤다는 날...."
"예.."
"니가 초소 안에 그 여자가 있다고 했을 때 말야..내가 확인했잖아"
"예.."
정상병은 계속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지막 한 모금의 담배를 빨며 말을 이었다.
"나도 초소 안에서 그 여자 봤다.."
"예?"
"나도 너처럼 그 여자 봤다구..."
"그런데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정상병은 담배꽁초를 슬리퍼 바닥으로 짓이기고, 다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말을 이어갔다.
"반투명한 희멀건 여자 형상이 허공에 반쯤 떠 있더라. 그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내가 어떻게 해볼 상대도 아니었어. 너무 겁이 나서 얼른 문을 닫았어. 정신 차리고 뭔가를 해야겠는데, 아니 미친 척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니가 그러고 있는 걸 보니까 화가 갑자기 치밀었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수송관이나 중대장한테 그 얘기 안 하셨습니까?"
"넌 부사수고 난 사수 아니냐. 게다가 다음 달이면 병장 달 놈이 그런 소리하고 있으면 날 뭘로 취급하겠냐? 본의 아니게 너만 찌질한 놈으로 만든 것 같다."
그 해의 장마는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조금씩 정상병은 정상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부대원들은 야간 근무에 대한 공포감을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조명이 없는 탄약고에 백열등이 설치되었고, 조금만 이상한 징후라도 보이면 위병소에 불이 켜지기 일쑤였다. 우리는 빨리 파견 나간 부대원들이 돌아오길 염원했다.
또 한 번의 소동이 벌어진 것은 장마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완전히 장마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며칠 동안 구름만 껴있고 비가 거의 오지 않았다.
그날은 야간 사격을 하는 날이었다. 주간 사격 때는 보통 소대장이 인솔을 하는데 그날은 중대장까지 참가를 하였다. 우리 부대는 자체 사격장이 있다. 연대나 사단 규모 사격장보다 작고, 표적도 자동화 타겟이 아니지만 150미터까지 표적을 설치할 수 있는 비교적 중급 규모의 사격장이었다. 대신 사로의 수는 작아서 동시에 5명 정도만이 쏠 수 있었다. 조그만 산 중턱쯤에 사격장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사로로부터 뒤쪽 10여 미터 아래에는 작은 연습장 겸 대기소가 있다. 그날 야간 사격은 영점 조준용 종이 타겟을 25미터 전방에 놓고 실시하였다.
야간 사격을 할 때는 가늠자와 가늠쇠에 형광물질을 바른다. 야간 사격은 가늠자 구멍을 통해 조준이 어렵다. 따라서 두 군데에 발라놓은 형광물질의 위치를 일치시키고 대충 쏘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표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표적을 맞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누가 보름달도 아닌 구름 낀 그믐달 아래서 보이지도 않는 25미터 거리에 있는 A4 규격의 황토색 재생용지를 맞추겠는가? 그냥 감으로 쏘는 것이다. 때문에 가끔 말년 고참들은 소총의 안전핀을 단발이 아닌 자동으로 놓고 9발을 그냥 드르륵 갈겨버리기도 한다. 말년 병장들이 하니까 중대장이 모르는 척하는 거지 내가 그랬으면 당장 얼차려를 받을 일이다.
"1조 탄창 삽입!!!"
"탄창 삽입!!"
"탄알 일발 장전!!"
"탄알 일발 장전!!"
"준비된 사수부터 사격 개시!!!"
"탕..타타타타탕..."
난 화약 냄새가 좋다. 어깨를 전해지는 소총의 반동이 좋다. 그리고 이 산 저 산에서 메아리치는 소총 소리가 좋다. 난 총을 잘 쏜다. 논산 훈련소 자동화 타겟에서 전진무의탁 자세로 20발 중 19발을 맞춘 적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쏴 보는 총이었는데 조교가 사회에서 총 쏴봤냐며 물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격은 나에게 군 생활 동안 고마운 존재였다. 나에게 휴가를 한 번 더 보내줬으니까.
안전 검사를 마치고 1조 사격이 끝나자 뒤에 서서 대기하던 2조가 사로로 진입했다.
바로 그때였다.
"사격 중지!!!!!!!!"
중대장의 엄명이 떨어졌다.
중대장이 왜 사격을 중지시켰는지 사로에 서있던 모든 부대원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표적 너머 숲이 시작되는 곳에 희멀건 형상이 서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몇몇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만 대부분은 볼 수 있었다. 사람일 리는 없다. 사격장 주변은 목책과 시멘트 방호벽으로 이중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람이 들어올 수 없을뿐더러 일단 부대 반경 3km 이내에는 민가가 없다. 인접한 부대도 없다. 간첩이라면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사격장 표적 근처에서 자신을 드러내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사격 전에 표적지 주변을 순찰하고, 사격 5분 전에는 사이렌까지 울리고 경고 방송까지 한다. 집단 최면이 아니라면 우리 대부분은 두 눈으로 그 형상을 본 것이다.
사격 중지를 명령한 중대장은 한참 동안 말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움직이지 않는 형상만을 주시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그 형상에게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이!! 거기 누구요?"
메아리처럼 중대장의 목소리가 사격장 주변을 맴돌았다.
아무 반응이 없는 그 형상.
갑자기 중대장이 그 형상이 있는 표적지 뒤의 숲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중대장...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얘기 좀 합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형상은 말이 없었다.
가까이 접근한 중대장은 그 형상이 뭘로 보였을까? 목책과 방호벽 때문에 어쩌면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격장은 사로에서 표적지까지 완만한 U자로 구부러진 형태라 표적지가 있는 곳으로 접근하면 목책과 방호벽 뒤편이 보이지 않는다.
중대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왜 우리 부대원들에 이러십니까? 우리 얘기 좀 합시다.!!
왜 우리 부대원들을 괴롭히십니까?"
그런데 중대장의 이런 질문에 돌아온 것은 외마디 비명소리였다.
"으아아아악!!!!!!!!!!!!"
우리는 동시에 살을 에는 듯한 전율과도 같은 소름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내 옆의 고참들의 숨소리 같은 말소리가 들렸다.
"와...신발 잠이 다 확 깬다."
중저음의 여자 목소리. 톤은 낮았지만 확실히 남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냥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TV 사극에서 고문을 당할 때 고통에 못 이겨 울부짖는 소리!!!!!!!
우리를 깨운 건 중대장의 외침이 들렸다.
"야..밑에 있는 부대원들 전원 소집시켜!!!!!!!!"
우리는 근무자를 제외한 한 명의 열외도 없이 총과 손전등을 준비하고 표적지 주변으로 모였다.
"잘 들어라. 오늘 그년이 누구인지 잡는다. 1소대는 사격장 왼쪽, 2소대는 사격장 오른쪽 외곽으로 돌아라. 3소대는 정면 쪽문을 통해 나가서 숲속을 뒤진다. 그리고 4소대는 나와 함께 위병소 뒤쪽의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숲속을 살핀다. 그리고 탄창 분리해라. 절대로 총을 쏴서는 안 된다. 싸우더라도 총을 쏴서는 안 된다. 소대장은 내려가서 위병소 포함 부대 내의 모든 근무자들에게 불을 밝히라고 해라. 모두 산 정상까지 올라가면, 수색을 종료한다."
이렇게 해서 1시간 동안 우리의 야밤 순찰은 시작되었다. 2소대에 속한 나는 사격장 오른쪽 외곽으로 진입하여 목책과 방호벽 외곽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며칠 동안 비가 거의 안 왔음에도 아직도 산속의 흙은 걷기 불편할 정도로 질퍽거렸다. 게다가 나무 사이사이에 있는 무성한 덤불과 잡목은 우리의 전진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부대원들이 같이 있음에도 수색 작업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우거진 덤불 속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손으로 하나씩 열어제낄 때마다 누군가가 바로 코앞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산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우리 부대는 가을에 이 산에서 싸리나무 채취 작업을 한다고 했는데. 길을 잘 모르는 쫄병들이 길을 잃을까 봐 고참들은 수시로 2미터 이상 서로 떨어지지 말 것을 계속 강조했다. 30여 분이 지나자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속에서 부대 쪽을 내려다보니 부대 전체가 하얗게 밝혀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거의 부대원들의 생각은 같을 것이다. 이 여자는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의 예상은 맞았다. 수색 시작 1시간 뒤쯤에 우리는 모두 아무런 소득 없이 산 정상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그날 야간 사격은 그렇게 끝났다.
밤 12시가 넘도록 행정반에서 중대장과 소대장, 그리고 말년 병장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신 소동을 겪었던 모든 사병들과 말년 병장들, 소대장, 수송관 모두가 다음날 아침 중대장에게 불려갔다. 물론 나도 거기에 속해 있었다. 모두들 하나부터 열까지 빠짐없이 얘기를 하는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듯했다.
그 와중에 나는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부대에 오기 한참 전에 한 사병이 외곽 초소 근무 중에 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다행히 같이 있던 근무자를 포함 아무도 상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 사병은 군기 교육대로 끌려갔고 부대에 복귀하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다른 부대로 전출갔다는 것이다. 당시 그 사병은 무엇에 홀린 듯 미친 사람처럼 욕설을 하며 근무지 주변을 뛰어다녔다고 한다.
이야기가 한 시간쯤 지나자 우리 부대에서 5년 넘게 근무 중인 수송관이 목매달아 죽은 그 여자 얘기를 꺼냈다. 중대장은 이 부대에 부임한지 2년이 채 안 된다. 때문에 그 여자 얘기를 처음 듣는 것이었다. 중대장은 신기한 듯이 수송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중대장은 이 얘기를 부대원들이 모두 알고 있느냐 물었고, 수송관은 대부분 알고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잠시 동안 입을 굳게 닫고 있던 중대장이 무엇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도 군 생활 동안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기이한 얘기를 많이 들었었고, 직접 몇 번 경험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무시하고 지나갈 수준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지난번 처음 사건을 보고받았을 때 나는 사태의 심각성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대장에게 보고하겠다."
이에 수송관이 물었다.
"보고해서 어쩌시려고 하십니까?"
"천도재라도 지내야 되지 않겠나?"
"예? 천도재요? 이승을 떠도는 귀신을 달래서 저승으로 보낸다는 그 천도재 말입니까?"
"그렇네. 지금 부대원들의 사기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되지 않겠나?"
"에이...대대장님이 기독교 신자인데 허락하시겠습니까?"
"안 되면 내가 나서서라도 해야지."
이때 대대장이 부대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우렁찬 경례 소리가 위병소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중대장을 포함 모든 간부들은 CP 앞에 정렬하여 대대장을 맞이했다. 나중에 소대장으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중대장이 대대장을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무속이 아닌 불교식의 천도재를 지내기로 했다.
며칠 후 중대장의 사비로 음식을 간단히 준비하고 불교 군종병의 섭외로 인근 절의 주지스님을 모셨다. 천도재는 오전 10시 위병소 옆 공터에서 그녀가 살던 집을 마주 보고 시행되었다. 근무자와 취사병을 제외한 모든 부대원이 집결하였다. 물론 대대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주지스님을 대대장 1호 차로 모셔오라고 명령했다.
대대장 1호 차를 타고 누군가가 위병소 정문 앞에서 내렸다. 나이는 들어 보였지만 깨끗한 승복을 입은 아주 선하고 강직한 인상의 스님이었다. 오늘 천도재를 주관할 분이었다. 제단 앞에 서서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그 스님은 입을 열었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는 요절, 횡사, 자기 집이 아닌 타관, 거리에서 죽는 객사, 결혼하지 못하고 죽는 미혼사, 자살, 타살로 인한 죽음, 교통사고 등의 사고로 죽은 사고사 등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도 저승에 들지 못하며 이승을 떠돌면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원귀가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지박령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지박령들은 처음에 죽었던 곳에 머물며, 누군가를 한없이 기다리거나, 또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살아서 하던 일을 계속하기도 합니다. 이런 원혼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나 자신을 방해한다고 생각이 들면, 처녀귀신이나 몽달귀신 같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천도재란 이런 원혼들의 넋을 위로하여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의식입니다. 그들의 가슴에 맺힌 한과 억울함을 풀어주고 저승으로 편안하게 보내주는 것이지요. 이곳에 오기 전에 오늘 제를 지내게 될 원혼에 대한 슬픈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원혼은 자신을 버린 남자를 기다리고 있거나 아니면 군인들에 대한 원한으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하느님을 믿으시는 분은 그 원혼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부처님을 따르시는 분들은 극락 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해 주시기 바라며, 종교 없으신 분들도 오늘만큼은 꼭 이 원혼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기원해 주십시오."
원래 천도재는 보통 두세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천도재는 30분 정도로 간단하게 행해졌다. 주지스님은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며 중간중간 절을 하였다. 기독교 신자인 사병들은 서서 기도를 했고, 나머지 사병들은 엎드려 주지스님을 따라 절을 했다. 표현의 방식은 달랐지만 오늘 우리 모두의 바람은 모두 같았다. 거의 막바지쯤 술을 올리고 스님은 알아듣기 힘든 내용의 천도 제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그 제문을 불태웠다.
30여 분간의 의식이 끝나자 목탁소리가 멈추었다.
끝난 것 같았다.
그리고 주지스님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고 무엇인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젊은 처자 양반. 이승에 연이 닿지 않는다, 하여 이렇게 미련을 가지고 구천을 떠돌면 어떡하나? 이승에 연이 없으면 반드시 저승에서라도 연이 닿는 법, 반드시 다음 생에는 자네의 인연을 만날 것이네. 산 자를 괴롭히는 것은 극락왕생을 바라는 죽은 자의 도리가 아닌 법, 이제 그 한 서린 마음을 풀고 부디 이승의 끈을 놓게나."
주지스님의 그 말에 감동을 먹었는지 아니면 그동안의 겪은 일이 서러웠는지 나를 비롯한 몇몇 부대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천도재를 지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다니 왠지 오늘은 그녀가 친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우연인지 아니면 주지스님의 애절하고도 간곡한 부탁이 통했는지 그녀의 눈물 같은 비가 한 방울 두 방울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중대장님. 한마디 하시겠습니까?"
"예?"
주지스님의 갑작스런 부탁에 중대장은 머뭇거렸지만 곧 모자를 벗어 왼쪽 품에 안은 후, 제단 앞에 서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대원들을 대표하여 이전에 있었던 불미스런 일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이제 우리 부대원들을 용서해 주시고 편안히 잠드시기 바랍니다."
단체 경례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장마가 끝난 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잘못을 빌고, 죄를 씻었다는 기분 때문인지 천도재 이후로 부대원들은 사기를 되찾았고, 더 이상 귀신소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진짜 귀신은 우리 마음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평안을 되찾자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가 시작되어 훈련이 줄어들면서 파견 나갔던 부대원들이 속속 복귀하기 시작했다. 근무 일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부대 생활은 정상으로 돌아갔다. 그동안의 일어났던 일들을 복귀한 부대원들에게 얘기하자 그들은 마치 재미있는 영화라도 보는 양 신기한 듯 듣고 있었다.
아직도 그 미스테리한 일련의 사건들의 전말은 풀리지 않고 있지만, 확실한 건 이제 그 일들이 한밤의 해프닝처럼 느껴질 정도로 잊혀졌다는 것이다.
출처 : 하드론의 이야기 산장 ( https://cafe.daum.net/hardron-s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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